풍경

남한산성 밟기(풍경)

0807mb 2015. 5. 2. 14:22

남한산성은 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흔히 역사책에서 공부하는 내용은 병자호란과 관려이 있는 '삼전도의 치욕' 이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에 피신했다가 청나라에 항복하여 아홉번이나 맨땅에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을 겪엇던 것이다.

삼전도는 지금의 송파구 삼전동이다. 삼전도의 비극은 인조반정으로부터 기인한다.

 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인조와 서인세력은 광해군이 표방했던 중림 외교노선을 반청노선으로 바꾸면서 청나라 태종의 분노를 사게 되고 청의 침락을 받게 된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이때에는 최명길이 강화회담에 나서 청과 형제관계를 맺기로 하고 청나라는 철수했다.

그런데 1636년 청나라는 형제관계를 폐지하고 군산관계를 요구하면서 공물과 군사 3만명의 지원을 청하자 조선조정은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청과 화(和)를 끊는다는 선전교서를 내기에 이른다.

결국 청 태종은 12만의 군사를 이끌고 질풍처럼 내려왔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종묘사직의 신주와 봉림대군 등을 강화도로 보내고 1만 3천의 군사로 남한산성에서 진을 쳤는데 양곡 1만 4300석, 장 220항아리로 겨우 50일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식량밖에 없었다. 40여일이 지나자 성인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와 죽음으로 막아내자는 주전파가 팽팽히 맞섰으나 대세는 이미 주화파 쪽으로 기울었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지 45일 만에 결국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삼전도에 내려가 항복하고만다. 산성 안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고 유사시에 사용할 숯을 묻어 두었던 매탄처, 병사들의 숙소인 군포, 왕의 숙소인 행궁이 설치되었으며 광주시의 읍치를 산성 안으로 옮겨 각종 관아 건물과 창고를 설치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인들의 박해터로 이용되었는가 하면 근대에는 한동안 군교도소가 위치하기도 했던 곳이다

- 출처:광주남한산성문화제-

 

우리는 주차공간이 없어 하행선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인도가 없는 1차로를 걸어올라갔다.

시구문→제3옹성→2→1옹성을 지나 남문(지화문)→수어장대→국청사→산성로터리로 내려왔다

 

 

 

아래 사진에 대한 설명이다

 

 

남문인 지화문

 

 

 

남한산성 전역에는 이런 소나부 군락이 많이 있다. 상당히 오래된 소나무도 많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현존한다.
원래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 라 부르던 것을 영조27(1751)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고 안쪽에는 무망루, 바깥쪽에는 '수어장대' 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며, 서대라고도 불렀다.

수어장대의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상층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양식의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루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익공식이다.
1층의 사방 1칸은 복도로 비워두고 정면 3칸, 측면 2칸만 장마루를 깔고 사방에 높이 45cm의 난간을 둘렀다.

 2층은 1층 우측 뒷켠에 있는 사다리를 통하여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방에 판문을 달았으며, 판문에는 태극무늬를 그렸다.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수어장대 왼쪽에 있었던 오래된 소나무

왼쪽 아래가 청량당이다. 

청량당은 이 성을 쌓은 팔도 도청섭인 벽암 각성대사와 함께 이회와 그의 부인의 영혼을 모신 사당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 되어었다.
이회는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로 충직한 인물인데 그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으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 후 이회의 무고함이 밝혀진 이후 수어장대 서쪽에 그와 부인의 영혼을 위안할 목적으로 청량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아래 사진에 대한 설명이 있다. 수어장대의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오른쪽엔 이승만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전나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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